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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한국사 - 북쪽의 역사

by 까미진 2021. 9. 5.

책의 개요

출판 : 위즈덤 하우스

집필

여호규- 학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대국가 관련 저서 여러 권 집필

박준형-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며 군사전략학과 교수, 고조선및 기원전 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김종복-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발해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박재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려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송용덕-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고려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이흥권- 강원대학교 사학과 강사, 의암류인석기념관 기념사업팀장,  조선 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 역사문화원 교수, 근현대의료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재직, 근현대사 도서와, 여러권의 시집 집필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교수, 근현대사관련 도서 여러 권 집필

 

책머리: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의 남쪽에 살며 북쪽의 역사를 점차 잊어가며 살아왔습니다. 북쪽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교역로로서 전쟁 시에는 침입로로서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전환기를 맞았으니, 북쪽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기획된 도서입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북쪽 땅의 역사를 시대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고, 고려 역시 수도가 개경이어서 북쪽의 비중이 컸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에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은 도서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는 헌법에 영토에 대한 조항은 없습니다. 광복 직후 헌법을 제정하며 헌법 조항에 영토 범위를 넣은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어저 오고 있습니다. (헌법 제3조) 그것은 식민 지배 이후 우리의 땅을 중요시했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습니다. 반도라 함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대륙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름만 반도일 뿐 육로로는 대륙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마치 '섬'같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의 시작 

우리나라 역사의 처음은 고조선이었습니다. 사료의 한계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대체로 위만조선을 포함한 옛 조선을 말합니다. 고조선의 사료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제외하면 중국의 기록입니다. 그 기록을 통해 고조선의 시작과 멸망의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제나라 환공과 무역을 한 사료도 있는데 사료상에는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는 중국의 시선이었고 고조선의 것을 고가매입을 원했던 기록을 보아 대등한 무역관계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한나라가 무력으로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한의 군현 지배를 극복하며 고구려가 성장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군사력과 외교력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가 강성해진 이후에도 계속 맞서는 외교정책을 고집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을 규합하여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발해와 신라로 이루어진 남북국 시대에 발해와 신라는 교류가 많이 없었습니다. 당과 일본에 백여 회 삼십여 회를 각각 사신을 파견한 것과 비교되게 신라에는 3회만 사신이 왕래했다고 합니다. 조선 전기 신라는 정통이고 발해는 주변국의 역사로 간주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자들의 주장으로 비롯하여 발해를 새로운 우리 역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신라 말 우리 역사에 호족이 등장했습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에도 진골이 정치를 이끌었으며 고구려와 백제 출신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고려는 각 지역의 호족들이 정치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고려는 중국 당나라 멸망 이후 절대 강자가 없었던 국제 질서 속에서 천자나 황제, 대왕, 왕이라 스스로 칭하며 주변국과 능동적 외교를 펼쳤습니다. 

 

북쪽의 땅

 고조선의 도읍지이기도 했던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중 도읍지로 삼기도 했으며, 고려의 태조 왕건 때엔'서경'이라 칭해지며 정치와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에 와서도 국방상 중요한 곳이었으나 조선 건국 시기부터 지역 차별을 받아 사대부가 없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에와 청나라와 무역이 활발해지며 다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려 시작의 기반이 된 개성은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지였습니다. 2013년 '개성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12개의 유적군이 등재되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며 한양으로 천도한 까닭에 개성의 위상이 추락하였으나, 육로와 수상 등 교통이 발달해 있었고, 학문적 기반도 탄탄하였습니다. 개성상인의 활약에 상업도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한인들이 만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수재로 흉년이 들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관리들은 부패하여 가혹하게 통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국경을 넘는 것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사형을 내리기도 했으며, 국경의 관리까지 엄함 처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고종대에 와 돌아오면 모두 용서할 것이라고 회유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북간도 지역은 독립운동 기지가 가장 많이 세워졌습니다. 북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가 발전하여 독립운동 단체, 독립군이 다양하게 조직되었는데 이들의 활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20세기 한국의 엘리트중에 평안도 출신의 비중이 대단히 높습니다. 독립 직후 정계, 재계, 학계, 예술계, 종교계를 주도한 사람 중 평안도 출신이 많은데 그 배경에 일찍부터 선교사들에 의해 평안도가 한국 기독교의 본고장이 되었던 점이 있습니다. 평안도에서의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닌 근대 문명으로서 지역 사람들의 이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국 학교의 38%가 평안도 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서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반봉건 근대화의 시점에서 볼 때 가장 선진 지역이 었던 평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기득권 지역으로 탈바꿈하며 반공 세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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